당신의 향나무 이야기를 해 주세요.
글 임보람
나는 어릴 때 마당에 심어져 있는 정원수를 아버지와 함께 가위로 다듬어 예쁘게 만들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경험들이 이번 “향나무 이야기” 사진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이제 나는 어릴 때처럼 나무를 만질 수 없다. 만질 나무도 없거니와 만지는 방법도 모른다.
대신 가끔씩 보이는 작업복 입은 아저씨들께서 아침마다 물을 주고 잔디를 다듬으며 가위로 나무를 둥글둥글하게 잘라낸 나무들을 바라볼 뿐이다.
… 누구를 위해서 이 나무들은 이곳에 심어져야 했고, 왜 그렇게 다듬어져야 하는지 생각을 해본다. 나무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 않았다.
나무들은 자연이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인공정원에서 인공적으로 키워졌다. 하지만 나무들은 나무들만의 이곳저곳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냥 가다가도 가끔은 미소를 지어주는 여유가 있으면 한다.
혹시나 나무가 말을 걸어왔을 때 흔쾌히 대답할 준비까지 되었다면 우리들이 어릴 때 나무를 잘라냈던 그 추억을 다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 이다슬, 작가노트 중에서
작가 이다슬은 사진으로 ‘향나무 이야기’를 읽어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야기의 밑바탕에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카메라를 가지고 향나무에 대한 기억을 들여다본다. 기억 속에서, 그리고 기억의 재현 속에서 그는 특히 자생적으로 자라난 향나무가 아닌, 정원에서 가꾸는 향나무에 주목했다. 그리고 어릴 적 아버지와 정원에서 예쁘게 다듬던 향나무들을 기억해냈다. 잎이 무성해지면 반드시 깎아줘야 했을 것이고 비죽이 솟아나온 가지를 용서하지 않았을 게다. 이들은 자연의 힘을 빌고 대지를 발판삼아 자유롭게 자라나기 보다는 환경의 요구와 길들여짐에 익숙한 삶을 향유하는 나무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시선에 안타까움이나 연민 같은 감정이 묻어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회와 제도와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가의 지난 연작 ‘아이들‘처럼, 관공서의 정원에서 환경에 길들여진 향나무들에 대한 기억이고 관찰이다. 여기에서 향나무 연작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이 교차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정원과 향나무는 제도이고 사회라는 스투디움이며, 어릴 적 아버지의 나무는 그에게 있어서 푼크툼으로 스쳐 지나간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전자는 사진이 재현해내는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문화적 의미를 가리키고, 후자는 보편화될 수 없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체험을 뜻한다. 두 가지 상이한 체험이 사진의 시각적 경험인 셈이다. 스투디움은 사진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개념이며 이것은 관람자의 주관적 감정이 아닌 외부로부터 길들여진 문화이다. 작가의 향나무 사진과 관람자 사이에서 향나무라는 명칭, 나무의 다듬어진 모양, 넓은 정원, 이러한 객관적인 기호들은 인간의 요구, 사회의 환경 등 갖가지 의미로서 스투디움이 된다. 반면에 푼크툼은 관람자의 감각을 관통하는 화살이며, 우연적이고 주관적인 충격이나 감정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푼크툼이란 나를 찌르는 우연성이라고 했다. 그는 듀안 마이클스의 앤디 워홀 초상 사진을 가지고 푼크툼을 설명하는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연출된 워홀의 모습에서보다는 오히려 ‘끝이 넓적하고 부드러우며 딱딱한 손톱’에서 ‘나를 찌르고 지나가는’ 푼크툼을 읽어낸다고 했다. 향나무에 대한 기억을 찌르고 지나가는 푼크툼은, 작가가 들려주는 향나무 이야기의 재현을 통하여 관람자 자신의 기억 속에서 발현된다.
작가가 향나무들을 사진 프레임에 담아내면서 과거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이를 통해 관람자 역시 작가와 함께 기억을 들여다본다. 여기에 작가는 몇 가지 장치를 설정해 두었다. 우선 컬러를 배제하고 사진의 톤을 흑백으로 선택했다. 온갖 색채로 가득한 현실 공간의 구성이 아닌 마치 꿈 혹은 무의식의 공간을 더듬고 있는 듯이, 그리하여 사진은 더욱 비현실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또한 작가는 사진을 찍어내는 도구로서 플라스틱 렌즈를 끼운 토이카메라를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사진의 가장자리에 마치 우리의 눈이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듯 검은 실루엣을 만들어냈고 렌즈의 초점을 중심에만 맞추어 주변 부위가 흐릿해지도록 했다. 검은 실루엣과 흐릿한 초점, 카메라가 만들어낸 이러한 분위기들로 인하여 우리는 또 한 번 현실 공간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작가가 설정해 둔 몇 가지 장치가 만들어낸 효과는 마치 기억 속의 장면을 재현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아마 사진을 보면서 관람자는 작가가 전하는 향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향나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향나무 연작의 스투디움을 제공함과 동시에, 푼크툼의 경험을 슬며시 안겨줄 것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관공서 정원의 향나무를 기억하기 어렵지 않을 터이고, 누구든지 간에 사진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관통하는 화살을 가질 테니까 말이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