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22년 6월부터 8월에 있었던 전시, “거름 내는 소리”와 관련하여 철학자 ‘허경’ 선생님과의 대담 중 일부를 문서화하여 옮겨 놓은 것입니다.
1. 어제부터 이어지는 맥락에서, 이것은 당일에도 관객분들에게 설명해 주신다는 차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잡초를 뽑지만, 또 다른 한 켠에서는 잡초를 재배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초등학교를 다녔다면, 그 누구도 신체 검사에서 진행하는 ‘색각(색맹) 테스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렇게 도합 12년 동안 ‘색각 테스트’를 합니다(정상의 눈을 가진 일반인들은 색맹 테스트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1, 2학년 때는 대충 넘어갔지만, 3학년 때는 그동안 장난으로만 여겼던 알록달록 숫자 맞추기 놀이가 평생동안 트라우마로 남을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른 친구들은 책에 보이는 숫자를 큰 소리로 외치며 다음으로 넘어가는데 저는 가만히 서서 그 책을 바라만 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초가 지난 뒤, 선생님께서는 조금 짜증이 나셨는지 교실 안에 있던, 그리고 복도까지 줄을 서 있던 친구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다슬이 숫자 안보여!?”라고 말씀을 하셨죠.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어린 친구들은 나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며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다슬은 숫자를 못 읽는대요~, 너 뭐하냐~”. 그 때 부터입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내 눈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요. 엄마, 아빠한테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집에 가서 왜 나는 저 작은 책에 있는 숫자를 볼 수 없는지 묻고 싶었지만 숫자를 볼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고, 가족끼리 한라산에 단풍을 구경하러 올라갔습니다. 한라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이 단풍을 보며 아름답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엄마, 아빠, 여동생, 남동생 조차도 모두 간탄을 하며 좋다, 좋다는 말만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그 아름답다는 단풍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적녹색약’의 눈을 가진 아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눈은 빨간색과 녹색이 섞이면 색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적갈색으로 보일 뿐이죠. “다슬이도 단풍 좀 봐봐~ 예쁘지?”라고 엄마가 말씀을 하셔도 저는 정말 예뻐서 감탄하는 어린 아이의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다녔고 나이가 올라갈수록 제 눈에 대한 주변인들의 시선은 비례해서 나빠졌습니다. ‘눈깔병신’이라는 말도 들어봤으니까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생물 시간에 비로소 염색체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적녹색약 유전자를 가진 보인자’라는 것 을요, 그리고 하필이면 제가 운이 너무 나빠서 남동생은 정상이고 저는 ‘적녹색약’이 됐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게 염색체에 빠져서 공부를 하다 보니 참 아이러니하게도 생물 수업 중 유전자 관련 부분은 모두 꿰뚫었습니다. 제 눈이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부분만 열심히 파고들었던 겁니다. 여담이지만, 제 눈이 비정상이었음에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내에서 받을 수 있는 미술상은 제가 다 받았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제주도에서 주는 미술상도 대부분 놓치지 않았지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미술 대학은 일찍 포기했습니다. 대부분의 미술 대학에서 신체 검사를 했던 시기였고, 그 중에 ‘색각 이상자’는 입학 거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에도 인문반이 아닌 자연반에 들어가서 공대를 가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 재수를 해서 세종대학교 건축과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자퇴를 했고 제주도로 무작정 돌아와서 동네에 있는 미술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제도가 조금씩 변하면서 신체검사를 하지 않는 미술 대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하지만 학원 선생님이나 같이 그림을 그렸던 그 누구에게도 제 눈이 ‘적녹색약’이라고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원에서는 주로 수채화를 중심으로 입시 미술을 했고 저는 물감의 위치와 배합 비율을 눈과 손의 감각만으로 무조건 외워야 했지요. 왜냐하면, 그 때 ‘석고 정물 수채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갈색 계열과 파란색 계열의 물감을 섞어서 무채색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제 눈은 갈색 계열이 조금 더 혼합이 되어 붉은색이 비치는 무채색이 만들어져도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매일 선생님께 혼 났지만, 정상인의 수준까지 따라잡는데 5개월 밖에 안 걸렸습니다. 아침 7시에 가서 밤 11시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 지금은 사진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빛의 3원색인 RGB와 보색 관계에 있는 색의 3원색 CMY로 만듭니다. 하지만 이제는 잘 아시다시피 저는 Red와 Green, 그리고 Magenta의 색을 정확히 구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모니터로 후반 작업을 할 때 전체적으로 Red가 끼거나 Green, Magenta가 내비쳐도 모릅니다. 이건 전체적으로 특정 색이 들어가는 경우이지만 주로 부분적으로 위의 세 가지 색이 들어가면 아예 까막눈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 작업을 할 때는 채도 부분을 0 – 100%까지 조절하면서 제 눈에 익숙한 채도로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정상인의 눈으로 봤을 때, 제 사진은 Red와 Green, Magenta가 조금씩, 또는 아주 많이 빠져서 칙칙하거나 독특한 색의 스펙트럼을 가진 사진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이 조차도 최근에 와서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끄럼 없이 이야기하고 다니지만 대학원에 다닐 때 까지만 하더라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남들처럼 똑 같은 색을 표현하고 싶었죠. 물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만요. (초등학생 때, 남들과는 다른 비정상적인 눈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럼 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였습니다. “그 세상이 조금 덜 아름답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질문부터 이야기가 아주 많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조금만 정리를 해보면, 제 눈이 다른 이들의 눈과는 다르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부터 모든 것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내 눈만 이럴까? 나는 남들보다 그림도 잘 그리는데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재수가 없겠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저는 남들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살면서 겪는 아이러니한 사건들 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비교적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물론 농사를 직접 해보면서 겪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들도 무척 크게 와 닿았습니다. 600평 정도 규모의 땅에서 처음 농사를 시작하게 된 저는 ‘유기농 참기름’을 목표로 했습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참기름이 수입산이거나 농약을 사용한 참기름이었기 때문에 그들보다 큰 목표를 세웠지요. 그래서 호기롭게 참깨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참깨 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멘붕(?)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참깨 싹과 잡초 싹이 비슷해서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달만 더 관찰해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한 달 뒤, 어떤 녀석이 잡초인지, 참깨인지 구별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잡초를 뽑는 순간 어린 참깨도 후두둑 같이 뽑힙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나중에 잡초를 뽑기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달 뒤, 이제는 잡초와 참깨가 뒤섞여 초원을 이뤘습니다.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잡초와 참깨가 같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잡초는 뽑아줘야 했기 때문에 참깨가 같이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해 뽑았습니다. 결국 600평이라는 작지 않은 땅에서 겨우 참기름 3병을 얻었습니다. 가늠하기 쉽게 설명을 드리면 600평 규모로 참깨 농사를 하면 보통 50~60병 정도 수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병이면 얼마나 초라한 성적인지 짐작이 되실 거예요. 이 과정에서 저는 다시 아이러니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잡초 하나를 뽑으면 참깨 뿌리가 2~3개 같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 본격적으로 농사를 하기 위해 280여 그루의 “아로니아 나무”를 심었고 매 해마다 반복되는 잡초 뽑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릎 연골이 사라질 정도(작년에 정형외과에서 제 무릎에 연골이 거의 다 닳아서 없어졌다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로 열심히 뽑아도 결국 잡초는 다시 울창하게 자랄 것을 알면서도 뽑습니다. 아이러니의 연속이죠. “농약을 치면 될 것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친환경 농법과 유기농 재배법으로 아로니아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이제 아로니아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6~7년 전에는 뜨는 작물이라고 여기저기서 홍보하면서 상당히 많은 농가에서 아로니아를 심었는데, 이제는 대부분 나무를 베어냈다는 말입니다. 500g이 안되는 한 상자를 아로니아로 채우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너도나도 먼저 팔아보겠다고 숙성도 안 된 아로니아를 팔아버리는 탓에 소비자들은 대부분 아로니아가 맛이 없다. 떫다라고 소문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폭락했고 500g 한 상자에 5,000원도 못 받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한 시간동안 수확해서 최저시급도 안 되는 가격으로 거래가 되고 있으니 그 누구도 더 이상 아로니아를 재배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이익 노선에 따라 나무들은 쉽게 베어서 버려집니다. 아, 저는 당연히 아직도 아로니아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아로니아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은 없지만요. “삶은 모순으로 뒤엉켜 있고 우리는 그 모순들과 살아야 한다.” 작업 노트 둘째 문단의 첫 문장의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변이 모두 모순들로 가득한데 그 모순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순의 끝에 무엇이 있으며 그 끝에 서서 무엇을 볼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실에서 잡초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모순덩어리가 되어보자.” 였습니다. 아로니아에도 주지 않는 비료를 잡초한테 주기 시작했으며 아로니아 영농일지는 잡초 재배 일지로 대체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그 끝을 알 수 없는 모순의 깊은 골짜기로 홀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왜 늘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2. 잡초라는 명칭 자체가 인간의 쓸모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실은 세상에 잡초가 없다고 할 때,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잡초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는 이유.
이번 프로젝트의 대상은 잡초이고 이 잡초들은 또한 우리 인간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의해 재배되는 식물이 아니라는 뜻으로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잡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 이에 대해 결국은 인간의 명명, 분류체계다, 라고 어제 답을 주셨는데, 조금만 더 부연 설명을 한다면. 잡초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잡초의 의미를 묻는다면,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잡초를 규정하는 정의를 묻는다면 대답은 달라집니다. 잡초란 원하지 않는 식물, 귀찮게 하는 식물, 유해한 식물, 또는 가치 없는 식물입니다. 모두 인간 중심으로 잡초를 규정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인간 중심이 아닌 식물 중심으로 잡초를 규정할 경우, 잡초란 무엇일까요? 잡초란 교란지에 자생하는 식물입니다. 즉, 농경지나 생활지 주변 등 교란지에 자생하면서 개체군을 형성하는 식물입니다.
4. 글과 사진 또는 작업이 분리 불가능한 방식으로 얽혀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이미지/텍스트 작업을 실시간으로 병행하게 된 계기.
아래의 텍스트는 2006-2008년(대학교 2학년-4학년)까지 진행한 D.R.A.M.A 프로젝트와 관련한 작업 노트와 내용입니다. 그리고 작은 소설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따로 이메일로 첨부해서 보내 드릴께요. 제 눈이 ‘적녹색약’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글로 쓰면서 내성화 작업을 거쳤던 것 같아요. 많은 글을 쓰면서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위로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미술부과 문예부를 같이 했습니다. 혼자 앉아서 나 혼자 다르게 보이는 이 세상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과 기억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됐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 작업은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시작한 칼라 사진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미지와 텍스트가 실시간으로 병행하게 된 계기는, 출발점은 [잡초 재배 일지] 부터입니다. 필름으로 촬영을 하고 촬영 후에 바로 당시 있었던, 느꼈던 감정들을 풀어내지 못하면 그 때의 생각들이 잘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실시간이 아닌 텍스트도 있습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두 개의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진행 중에 있는 프로젝트인데요, 작업이 모두 완결되면 추 후, 이미지를 선별하고 그에 따른 텍스트들을 쓸 예정입니다(P-3 오라이온(Lockheed Martin P-3 Orion) 프로젝트). 하나 더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보통 제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현실에서 불가능한, 누릴 수 없는 여행이나 경험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거나, 오히려 반대로 현실에서 가능하지만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는 내용을 고백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5. 글을 읽다 보면, 화가 난다는 표현이 종종,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상황의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맥락에서, 모든 것은 내 게으름, 내 책임이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물론 상징적 선언적 비유라는 것을 알겠지만, ‘내가 근본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대전제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묻는다면? 저는 근본적으로 게으른 편에 속합니다. 미술 대학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들에게 나눠준 다이어리를 지금도 갖고 있는데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내가 하루 연습을 거르면 자신이 그 사실을 안다. 이틀이면 비평가가 안다. 사흘이 되면 청중이 알게 된다. -Jascha Heifetz(야사 하이패츠) 1901-1987- 위의 짧은 글을 보고 상당히 큰 충격에 빠졌고 지금까지 작업적인 면에서는 스스로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게으름이 비치거나 보인다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 화가 난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